동행 회원 인터뷰 #2. 백희정 상임이사(지역공공정책플랫폼 광주路)
2018-04-24      조회수 121


동행은 지난 3년 사이에 3번 이사를 했어야만 했는데요. 첫 번째 이사했던 여연 사무실, 세 번째 이사했던 현재 도시철도공사 지하 사무실을 이분이 연결해주셔서 이사올 수 있었습니다. 동행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신 백희정 회원을 모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행 회원분들께 자기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끄럽네요(웃음). 이름은 백희정이고요. 지금은 지역공공정책플랫폼 광주路라는 단체에서 상임이사로 있습니다. 이전엔 2000년부터 광주여성민우회에서 활동가로 시작해서 대표를 역임했고요. 진보 성향의 9개의 여성단체들이 모여 만든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의 대표직을 2017년 1월까지 맡았습니다. 그동안 지역 여성 정책 활동을 기반으로 한 활동을 민우회에서 했었고, 그 관심이 광주路로 이어졌습니다.


인터넷에 광주나비 활동도 활발히 하고 계시던데요.


아, 우리 광주나비도 있구나(웃음). 정식 명칭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광주나비” 입니다. 광주나비는 2017년 3월에 정식출범을 했고, 2015년 12월에 일본군 위안부 한일 합의에 대해 굴욕적인 합의를 한 적이 있었잖아요. 그때 이 문제를 반대하면서 폐기하라고 주장하면서 지역에서 동조 수요시위를 진행했습니다. 각 단체를 비롯한 개인들이 시위에 참여하고 이를 준비하면서 이후 등록된 광주·전남지역 위안부 할머니 중 한 분인 곽예남 할머니를 찾아뵙고 시위 이후에도 이러한 활동을 지속해서 할 수 있는 단체를 지역에 만들어보자고 이야기했어요. 그렇게 광주나비가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여연 대표 맡고 있었을 때인데 이런 생각을 가졌던 것 같아요. 우리 사회에서 일본군 성노예 바라보는 시각은 굉장히 다양하지만, 민족주의적인 시각에 기반을 둔 것이 주류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어요. 일본군에 의한 성폭력에 분노하면서, 현재의 성폭력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각은 온도 차가 있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위안부 문제에서는 끌려간 사람들이 소녀라는 이미지에 기반을 두어 순결한 소녀를 짓밟았다고 분노하는 반면, 성폭력 문제에서 “그날 술을 왜 마셨어?”, “옷은 왜 그렇게 입었어?”라고 피해자를 대하는 방식, 그러면서 아이들을 상대로 한 성폭력에 대해서는 분노하는 부분의 차이 등 말이죠. 젠더 문제. 성별 권력구조에 입각한 시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활동을 했습니다.
활동하면서 느낀 점은, 우리 동행도 회원 모집에 어려움이 있잖아요. 단체의 성격을 묻는다든지, 어떤 일을 하는지 등 말이지요. 반면, 광주나비 활동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굉장히 호의적이고 관심이 많더라고요. 올해 활동한 지 1년 정도 된 제가 굉장히 애정하는 단체입니다(웃음).


처음에 여성 문제를 비롯한 사회활동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이건 제 역사가 나오는 건데요(웃음). 제가 90학번입니다. 당시 여성 문제는 학교 민주로에 대자보 형식으로 문제 제기가 많이 이루어졌어요. 또한, 당시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서 벽 앞에 화장실 신문이라고, 성폭력, 기지촌 문제를 많이 다뤘어요. 1학년 때 화장실에 손으로 직접 쓴 화장실 신문을 만들면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두게 됐어요. 3학년 때는 총여학생회 활동을 했어요. 92년도에 보은이, 진관이 사건이라고 알려진 성폭력 사건들이 많이 있었거든요.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가 독재정부와의 대결 구도가 끝나니까 여성 문제가 주목받으면서 성폭력 문제가 많이 다뤄졌어요. 보은이, 진관이 사건을 접하면서 당시 큰 충격을 받았고, 제가 천안에 지원을 가게 됐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성폭력 문제, 여성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졸업한 이후에 97년경 광주전남여성회(여성민우회의 전신)에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회원 활동하고, 2000년에 민우회 상근활동가로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연재하고 계신 칼럼 중에서 “일본군 위안부” 가 아닌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신 부분이 있더라고요. 여기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가 미투도 있는데, 성폭력 문제에 있어 90년도 민우회가 여성주의 상담에 대한 필요를 느꼈어요. 민우회 활동을 하면서 쉼터를 만들었는데. 당시 “매 맞는 아내”라는 표현이 더 일상적이었습니다.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쉼터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공유됐지만, 성폭력 피해자 쉼터의 필요에 대한 고민이 내부에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상담 전화를 받으면서 가족이나 친족 간 성폭력 피해자가 많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전화를 받을 당시 이게 장난 전화인가 싶을 정도로 충격적인 일들이 많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피해자를 중심으로 한 여성주의 상담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성폭력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하는데, 그동안 우리는 성폭력에 대한 통념이 가해자 중심적이었습니다. 언론에서 성폭력 문제를 다루면서 사건명을 피해자 이름으로 이를 명명하는 것의 문제가 있습니다. 피해자 이름으로 사건명이 붙여지고,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의 문제 등도 있고요. 편견이 확대 재생산되는 데 따른 문제를 보면서 여성주의 상담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안부라는 단어도 그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하는 듯한, 강제성을 드러내는 표현이 안 들어가 있는 것이지요. 이것도 가해자의 입장에서의 명명이라는 생각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UN에서도 위안부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일본군 성노예라는 표현을 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말씀드릴게요. 중학교 2학년 때, 국사 시간에 선생님이 해줄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서 문을 다 닫으라고 하더라고요. 선생님이 당시 정신대 이야기를 해줬어요. 지금의 일본군 위안부. 성 노리개가 되었고,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해줄 때 문을 다 닫으라고 했고. 이건 정규 교육 과정이 아니었던 것이죠. 당시 충격이었습니다. 나중에 사회에 나와 보니, 정신대와 일본군 성노예는 서로 다르더라고요. 성노예라는 표현은 피해자 중심으로 여성의 인권을 짓밟은 것이고,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닌 강제적이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그렇게 불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현재 위안부라는 표현을 혼용하지만, 가해자 시각이라는 점을 공유한 것이지요. 정대협 또한 일본군 성노예로 달리 부르고 있습니다.


관련해서 <아이 캔 스피크> 영화 이야기도 하셨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처음으로 본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다룬 극 영화였습니다. 과거 다큐멘터리로 문제를 다룬 것과 달리, 근래 극 영화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귀향>의 경우 당시 피해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차마 못 보겠더라고요. 영화를 통해 그러한 순간들을 재현하는 것에 의의를 둘 수 있겠지만, 과연 피해자들이 스크린 앞에서 그 순간을 마주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이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와 관련된 극 영화에게 요구되는 윤리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고요. 그 점에서 대표님의 <아이 캔 스피크> 영화에 대한 이야기에 공감했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어요.


저도 비슷한 생각인데, <귀향>을 보면서 엄청 힘들었거든요. 공동체 상영을 통해서 함께 봤는데 공교롭게도 중앙 자리여서 중간에 못 나와서 힘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귀향>은 처음에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들었던 것 같아요. 사실 전달의 측면에서요. <아이 캔 스피크>와 비교해 보자면, 그 여성은 소녀로 표현한 한계가 있고, 저항할 수 없는 무기력한 피해자들인 거예요. 이 사람들이 그 이후에 어떻게 사는가도 정신병에 걸린다든지 힘든 삶을 사는 것으로 그려지니까 힘들었겠다고 이해를 하면서도, 또 하나의 선입견을 만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 캔 스피크>는 문제를 제기하잖아요. 그동안 자기 말을 안 들어주니까 정당한 민원을 내고 문제를 제기하는 할머니가 더 주체적이고, 사회 안에서 역할을 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다는 점에서 좋았습니다. 등록과 미등록으로 구분이 되는 피해자 할머니들 문제도 있고, 나옥분 할머니 같은 분들이 주변에 많이 계실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개인적으로는 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일본군 성노예였다는 고백이 최초의 미투가 아닌가 생각해요. 당시 여성들을 정액받이였다고 이야기했는데, 여성에게 순결이라는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요구하는 인식 속에서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이야기한 것은 굉장한 용기였다고 봅니다. 거기에서 다른 할머니들이 나도 그랬다고, 그리고 필리핀, 미얀마 등지에서도 나도 그랬다고 이야기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2018년 현재, 미투의 과정에서도 성폭력이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 해결해나가야 하는지도 이러한 경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최근에 베트남도 다녀오셨다고 들었는데요. 한국이 가해자와 피해자 입장이 정확히 바뀐 경우잖아요. 광주나비 활동을 하시면서 베트남 피해자들을 만났을 때 느낀 바가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올해 1월에 다녀왔어요. 베트남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광주나비에서 수요시위를 진행하면서 삼일절에 출범식을 했는데 민주광장에 정말 많은 분이 오셨어요. 집회가 정말 재미있고 괜찮게 이루어졌어요. 끝나고 나서 부담이 확 오는 거예요. 아주 잘 돼서 4월도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광주나비의 활동가들이 모여서 주제가 있는 수요시위를 만들어보자고 이야기했어요. 모인 단체들이 많은데, 평통사(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에서 한 분이 4월 30일이 베트남 전쟁 종전일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4월을 베트남 전쟁을 주제 중 하나로 삼자고 해서 기획을 했어요. 광주시민단체협의회의 정명일 대표님이 베트남을 많이 다녀오셨거든요. 그분께 증오비 관련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모두가 울먹일 정도로 이 문제에 관심을 더 깊게 두게 되었죠. 베트남 평화기행도 그러한 과정에서 사업을 잡아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시는 분이 베트남 평화기행을 다녀오라고 적극적으로 권해주셨고, 한베평화재단의 구수정 선생님과도 연결을 시켜주셨어요. 1월에 광주나비 출장을 겸해서 후원을 통해 기행을 다녀왔습니다.
한베평화재단은 평화기행을 1년에 몇 차례 정기적으로 진행을 하더라고요. 프로그램에서 학살 생존자들과 만나는 날도 있고요. 학살지를 가고, 피해자를 보면서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어요. 눈물이 나서 사람 꼴이 아닐 정도로요. 베트남 문제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고, 광주나비가 이후에 한일 문제만이 아니라 여기에도 관심을 두고 연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광주가 인권도시이긴 합니다만, 여기에 선도적으로 나서기는 어렵더라고요. 제주의 경우 강정마을 등지에서 “미안해요 베트남” 1인시위도 하고 그러거든요. 광주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공유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평화기행 이후 한베평화재단과 계속 연락을 닿고 있고, 번개 모임 등 계속 연을 가지고 있어요. 4월 21일부터 민변이랑 함께 시민법정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베트남에서 피해자 두 분이 한국에 오셔서 피해 경험을 이야기하고, 시민 배심원들이 판단을 하는 그런 형태인 것 같아요. 그중 한 분인 탄 할머니, 8살 때 유일하게 마을에서 살아남으신 분이 청와대 앞에서 1인시위하고 기자회견도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역사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일본 문제와 베트남 문제를 함께 가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다시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억하고, 반복되지 않게끔 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고, 이러한 부분들이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년에는 교육청과 같이 관련한 교육을 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평화기행도 늘 갈 수 없지만, 1년에 한 번 정도 학생들과 함께 가보는 것도 기획하고 있어요. 저도 그동안 여성단체에서 혐오나 페미니즘만 이야기하다가 역사, 외국 인권 문제를 접하면서 제 시야가 확장된 것 같아요.





아까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의 미투라고도 이야기하셨는데, 근래 미투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여성단체 활동을 해오시면서 이러한 근래의 흐름이 과거와 다른 지점이 있다고 느끼시는 부분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우선, 새로운 편견이 생겨나는 데 대한 걱정이 있어요. 최근에도 나타났는데 피해자들에게 신원 공개를 요청하잖아요. 서지현 검사에 대해 저희는 충격이었어요. 같은 여성이더라도 더 높은 지위에 있고, 똑똑하잖아요. 이런 세상에 사는 검사인 여성도 무기력하게 당했다는 생각했고, 허벅지를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만지고,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조직은 도대체 뭔가 생각했어요. 자신의 권력을 그렇게 드러낸 것 아닌가. 이 사람도 조직 내에서 해결 못 한 걸 8년이 지나고 이야기한 건데, 사람들이 왜 하필 지금이냐고 이야기하잖아요. 악의적인 의도가 있지 않냐고 문제 삼고. 성폭력 피해자의 문제 제기에 순결성, 진정성을 문제 삼는 거예요. 잣대를 대고. 김지은 비서의 경우도 자기를 지켜줄 것 같다고 이야기한 게 그 절박함이 저는 느껴졌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힘이 없고, 미투의 대상자가 높은 사람이 아니면 얼굴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라고 해요. 이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해요. 피해자한테 얼굴 드러내놓고, 당당하게 해야 한다고 하는 사회 분위기가 걱정됩니다.
미투에 대해 언론이 처음에는 ‘나도 당했다’고 명명했는데, 이후에 ‘나도 말한다’로 바꿔서 보도합니다. 이 둘은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나도 당했다’는 이야기는 성폭력 피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서 검사의 이야기는 8년 동안 나 힘들었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어떻게 해보려 했지만, 입막음 당해왔고 불이익을 입었다고, 조직은 그를 보호했다는 것을 까발리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힘들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반면, ‘나는 말한다’는 이러한 말하기를 통해 조직, 사회의 구조를 바꿔내야 한다는 인식이 담겨있어요. 미투가 ‘나도 당했다’가 아닌 ‘나도 말한다’로 옮겨가는 것은 긍정적이고, 고발을 통한 사회구조의 변혁을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 캔 스피크>의 나옥분 할머니처럼 주체적인 발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게 미투가 가야 할 방향이고, 갈 수 있는 동력이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내 안의 피해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변화의 운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엊그제 민우회 활동가들과 만나니까 상담소에 미투 전화가 폭주한다고 해요. 반면, 어제 성폭력 가해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 갔는데 그분들의 반발이 심하더라고요. 그분들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어려움도 겪고 그랬는데 인식이 정말 갭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생각해보면 저는 사실 우리 사회에서 안전한 곳에서만 살았어요. 성폭력 문제가 없는 곳이죠. 저에 대해 성희롱 발언을 조심하기도 하고요. 제가 오히려 고립되어 있었나 봐요(웃음). 교육을 하다 보니 그분들에게 페미니즘이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있더라고요. 관련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고요. 우리 사회의 의식 안에서도 양극화가 심하다고 느꼈어요. 예전에 어떤 분이 3만 불의 시대로 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하더라고요. 의식이나 가치도 같이 가야 한다고요. 현재 우리나라가 3만 불을 앞두고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 의식의 충돌, 과도기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광주에서의 여성단체 활동, 시민사회운동을 해오시면서 다른 지역과 다른 지점이 있다면요?


서울과 비교해보자면, 서울은 워낙 모든 권력, 자본, 인적 네트워크가 모여 있잖아요. 민우회의 경우, 본부와 지부가 독립적으로 운영이 되고 있어요. 활동은 서울의 것을 따라가는 입장이지요. 그대로 가져오거나, 따라 하는. 그런데 과거와 다른 것이 이전엔 가져온 것들이 지역과 잘 안 맞았거든요. 최근 여성 혐오 대응이라든지 미투라든지 이것은 지역적 상황에 맞게 잘 맞아 들어가더라고요.
광주는 시민사회가 건강하다고 이야기하는데, 새롭다는 생각은 잘 안 들지 않아요? 서울 회의를 가면 광주는 뭔가 다르다는 시각이 있어요. 다른 지역에서 부러워하고, 별천지처럼 생각하더라고요. 다른 곳에 비해 토양이 좋긴 하지만, 단체 활동에서는 부족한 면이 많아요. 그리고 세대교체가 안 되고 있어요. SNS를 통한 자발적인 운동의 흐름과 새로운 세대들이 나타나고 있어요. 촛불의 경험, 희망버스, 강정의 경험을 공유하는 젊은 세대들이 있는데, 광주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광주가 미투 청정지역이라고 하던데 이것이 곧바로 광주가 인권도시라는 의미는 아니잖아요. 없을 리가 없는데?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니까. 5. 18.이라는 역사를 공유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똘똘 뭉칠 수밖에 없고, 그 내부에서의 문제 제기가 덮어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시민사회가 더 발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활기차고, 네트워킹을 잘하고. 후배를 양성하는 측면이 필요합니다. 1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할 때 별반 달라진 게 없어서 광주가 걱정되기도 해요.
그동안 여성단체에서 일하면서 우리밖에 몰랐던 것이 아닌가 근래 생각해요. 공격당하고 지지도 안 해주니까 우리끼리 뭉쳐야 했죠. 후원을 받으러 다니면 환경단체에는 기꺼이 열리는 주머니가, 저희한테는 남자분들은 여자만 하는 거 아니냐며 부인한테 허락 맡아야 한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별소리를 다하는 거예요. 여성단체에 대한 편견이 왜 이리 많은 건지 회원 모집이 정말 어려웠어요. 여성단체가 일 정말 열심히 하거든요? 10년 정도 민우회 있으면서 다른 단체와 연대하고, 같이 무언가를 해보려는 시도가 부족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확산이 안 되고, 문제가 발생할 때 같이 대응하는 것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역사회에서 우리 문제만 보는 게 아니라 같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있고, 여성운동이 특히 공유하고 확산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광주路에서 활동하면서 조직들을 연결하고 서로가 하는 걸 서로 같이할 수 있는 매개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요새 어떤 책을 읽으시나요?


이제 읽으려고요(웃음). 이화영 작가의 <탐욕> 선물 받았는데, 이제 읽으려고 합니다.


처음 사무실부터 지금의 사무실까지 동행에 공간을 마련해주셨는데, 어떻게 동행과 연을 맺게 되셨나요?


제가 여연 대표를 하면서 민우회 대표를 하던 때였을 거예요. 갑자기 이소아 변호사한테 전화가 왔어요. 자기소개하셨는데 다 알아먹지는 못하고, 아 단체에 소속된 변호사인가보다 하고 만났어요. 민우회 사무실이 당시 롯데백화점 근처에 있었는데 찾기가 어려워서 늘 마중을 나갔거든요. 전화를 받고 마중을 갔는데 정말 씩씩하더라고요. “가고 있어요!” 근데 그때 처음에 충격이었어요(웃음). 저는 여성 변호사 하면 임선숙, 이민아 변호사만 만나왔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배낭을 메고 머리를 휘날리며 씩씩하게 걸어오는 이소아 변호사를 보고, 이 사람이 나랑 통화한 사람 맞나? 변호사 맞나? 그랬죠(웃음). 저한테 선입견이 있었던 거죠. 씩씩하게 막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하고, 그러다가 에이 씨 욕도 하면서 (웃음). 그때 NGO 센터에 인큐베이팅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여연 사무실 빈 공간이 생겨서 거기로 선뜻 쓰시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때의 인연이 현재 광주路의 같이돌봄가게까지 함께 오게 됐네요.


지금 동행과 함께 사무실을 쓰고 있는 같이돌봄가게를 소개해주세요.


처음에 광주路를 시작할 때, 플랫폼의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누군가한테 도움이 될 수 있는 공간 등을 제공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같이돌봄가게는 작년에 시에서 추경 예산으로 저출산 정책으로 예산으로 잡혔나 봐요. 출산맘을 위한 가게로 제안을 했는데 예산이 반영됐고 단체가 맡아서 사업을 진행하게끔 상황이 됐어요. 여기는 아름다운 가계의 출산 육아용품 버전이라고 보시면 돼요. 이 공간을 통해서 단순히 육아용품 판매가 아니라 2,30대 출산 육아 경험하는 여성들을 많이 만나보고 싶어요. 그들도 청년인데 청년 정체성이 아닌 엄마로서의 정체성을 많이 갖게 되더라고요. 청년 정책 사업을 보면 일자리와 창업 중심인데, 출산, 육아 분야에는 많이 지원이 없는 실정입니다. 이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좋은 정책이 태어나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4월 말에 오픈하고, 그러한 거점이 되길 기대하고 있어요.





동행의 운영위원이시기도 하고 처음부터 함께 해오고 있는데, 동행에 바라는 점, 제언 등이 있을까요?


광주에서 동행의 회원 확대비율 및 증가 건수가 가장 많지 않나 싶어요. CMS로 1만 원 받는 단체 중에서 동행이 독보적이죠. 우선 이소아 변호사가 처음 시작해서 동행을 알렸기 때문에, 인프라 내지 네임밸류라고 할까요(웃음)? 그런 것들이 큰 것 같아요. 민우회도 그런 경험이 있는데, 한 사람의 단체로 각인되는 것은 당시엔 좋을 수도 있지만, 다음 세대에 부담이 크더라고요. 역량 차이도 있을 수 있고요. 동행하면 이소아 변호사를 떠올리는 것 또한 지역사회에서 단체와 그 사람을 연관 지어서 이미지화시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부분들을 염두에 두시고 장점을 취하면서 앞으로 동행이 지속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역 안에서 동행에 대한 관심이 많아요. 새로운 조직이잖아요. NGO가 새로 만들어지기 어렵거든요. 새로운 변호사 라이센스를 가진 이들의 단체는 정말 대단하고, 고맙기도 하고,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동행과 동행하고 싶고, 늘 곁에 두고 싶어요(웃음).


백희정 대표님께 동행이란? 지난 인터뷰에서 김정희 변호사는 “친구였고 앞으로 친구일”이라고 답해주셨어요.


제가 예전 총회 때 써둔 게 있긴 한데 탈락했었는데요(웃음). 제게 동행이란, 그 실체를 까보고 싶기도 하고, 늘 같이 가고 싶은 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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