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녹난에게 묻고 답하다
2018-12-27      조회수 321








살짝 추웠던 날, 동행 사무실(도시철도공사 지하1층 같이돌봄가게 안)에서 
태국에서 온 인권활동가, 태국의 민주화를 바라는, 왕실모독죄로 구금될 위험을 피해 
모든 익숙한 것을 떠나 대한민국 광주로 온 차녹난을 만났습니다.
변화에 대한 열정과 확신을 간직한 차녹난과의 대화. 여러분도 함께 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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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표현하는 세 가지를 말씀해주신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저는 차녹난이고요. 태국에서는 서로를 보통 별명으로 불러요. 저는 toon(또운)이라고 불렸습니다. 정치인권운동가이고, 세 개의 다른 조직에서 활동 중입니다. 첫 번째 조직은 New Democracy Movement(새로운 민주주의 운동)이라는 곳입니다. 태국의 군부독재에 대항하는 곳이고, 2014년 군부 쿠데타 이후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조직은 tamtam이라는 곳입니다. 이는 태국어로 임신중단(임신중단, 이하 임신중단이라 표현하기로 함)를 뜻하고, 여성의 안전한 임신중단을 위해서 활동하는 조직입니다. 세 번째 조직은 Assembly of the Poor라는 곳입니다. 토지권을 알리고 정부나 기업의 토지수탈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단체입니다. 이렇게 세 곳에서 활동 중입니다.

 

 

저를 세 가지로 표현해달라 하셨지만 10가지, 100가지로도 부족할 것 같아요. 그렇게 말씀드리면 저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길 것 같습니다. 아마 저를 잘 아는 친구들도 저를 세 가지로 표현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난민 인정이 된 이후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뭔가 진지한 활동들을 하지는 않고 있는데요. 내년 목표 중 하나는 한국어를 배우는 것입니다.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도 많은데, 한국의 광주라는 도시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그 당시에 선택지가 많이 없었습니다. 소환장을 받은 바로 그 날, 당장 결정했어야 해서 몇 시간 안에 선택해야만 했어요. 태국에 남을지 떠날지 고민하다가 떠나기로 결정했고 그 때 한국, 필리핀, 홍콩이라는 세 개의 선택지를 인권단체로부터 제안받았습니다. 그 인권단체는 태국에 있는 국제기구이고 인권활동가들을 위해 일합니다. 인권활동들을 모니터링하고 인권침해사례를 조사하는 곳입니다.

 

한국의 경우 무비자로 90일을 머물 수 있는 반면, 홍콩은 15일밖에 머물 수 없어요. 생활비도 너무 비싸고요. 필리핀은 인권운동가들에게는 위험한 지역이라고 생각해서 가지 않았습니다.

 

광주에 오게 된 것은, 광주의 5.18 기념재단이 제 친구인 인권운동가 ‘파이’에게 광주인권상을 수여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활동하는 NDM도 5.18 기념재단과 네트워크가 있었고요. 그렇지만 한국에 오자마자 5.18 기념재단에 연락할 생각을 하진 못했고, 한국 온 지 한 달 정도 지나서 연락을 했습니다. 또 광주로 오게 된 한 이유는 전남대학교에서 공부하는 활동가 친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을 것인지 떠날 것인지 고민했다고 하는데, 두 가지 각 경우를 선택하려고 할 때 어떤 것들이 마음에 걸렸나요?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사실 그 당시에는 똑바로 생각할 수 없었어요. 제게 소환장이 날아와서 저도 주변 사람들도 모두 충격을 받았거든요. 소환장을 받은 이후로 2시간 정도 지인들과 통화를 했습니다. 지인들은 모두 떠나라고 말했어요. 이미 저와 똑같은 케이스(태국 왕실에 관한 BBC기사를 페이스북에서 공유)로 실형을 선고받은 친구가 있기 때문에요. 제 친구는 5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있었고, 그래서 저는 태국의 감옥에서 5년을 살 것인지 타국에서 15년을 살 것인지 결정해야만 했죠. 저로서는 결정하기 어려웠지만 가족들이 5년을 감옥에서 보낼 수는 없다고 저를 설득했습니다.

 

한국에 대해서 평소 어떤 것을 알고 있었고, 어떤 기대를 가지고 왔나요?

 

한국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었습니다. 태국의 젊은이들은 K-pop이나 한국 드라마에 열광하는데 사실 저는 음악을 들은 적도 드라마를 본 적도 없어요. 한국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김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대도 크지 않았어요. 여기 길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 안 했거든요. 한국을 거쳐 캐나다 혹은 프랑스로 가려고 했어요. 주변 사람들은 모두 프랑스를 추천했는데 난민 인정받기가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었죠. UNHCR이나 다른 국제 NGO들과 계속 접촉하면서 제가 어느 나라로 갈 수 있을지 알아보는 데에 일주일 정도를 보냈네요. 그 기관에서는 제가 제3국으로 갈 수 있기까지 몇 달이 걸린다고 했고, 그러던 와중에 동행의 이소아, 권소연 변호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오래 있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한국에서 난민인정신청을 하고 한국에서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서 한국에서 난민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오기 전부터 많은 곳에 본인이 직접 연락하고 직접 찾아가야 했을텐데, 한국에 와서 캐나다나 프랑스로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한 적은 없나요?

 

사실 오기 전까지의 과정이 힘들진 않았어요. 태국에서는 기관들이 먼저 저에게 연락을 했고요. 저는 한 명에게만 말했는데 5분 후에 각종 단체들에서 전화가 쏟아졌죠. 한국에서도 태국에서 온 인권활동가와 한국의 인권활동가들이 도와주었습니다.

 

한국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물론 처음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많은 것들이 자리를 잡았고 또 한국의 많은 활동가들을 알게 돼서 여기에서 활동하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10개월 동안 알고 지냈던 한국 사람들이 많은 지원과 응원을 해주었고, 그렇기 때문에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집을 그리워하지 않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어요. 태국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한국사회가 완벽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태국에서는 한국이 독재체제를 밀어내고 민주주의 국가가 된 과정을 굉장히 우러러보는 게 있어요. 그러나 제가 10개월 동안 이곳에 살면서 느낀 건, 이곳에도 인권침해나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기에서도 인권 활동가로서 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극을 받아요.

 

한국에 와서 지금까지 본인이 본 것 중에, 본인이 ‘한국이 그다지 민주적이지만은 않더라’라고 느끼게 만든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요?

 

사람들의 고정관념이요. 5.18 아카데미라고 전세계의 활동가들이 모이는 행사가 있어요. 20명 정도의 활동가들이 모였고, 인도네시아 친구도 있었어요. 그 친구는 100kg가 넘는 큰 몸집의 여성활동가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여성이 그 친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옆 사람에게 뭔가를 얘기하는데, 그 표정이 좀... 끔찍했어요. 그 친구가 너무 뚱뚱하다고 얘기하는 거 같더라고요. 아카데미에 참여한 또 다른 활동가 중에 아프리카계 친구도 있었는데요. 그 친구는 피부색이 검죠.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그 친구를 계속 쳐다보더라고요. 한국에서는 미(美)에 대해 굉장히 강조하고 있고, 여기저기 화장품 가게가 많아요. 그런 것들을 보면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미에 대해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또 다른 사례로, 제 옆집에 예멘 출신 부부가 살거든요. 아내 분과 친해져서 함께 다니는 일이 잦아졌는데, 저희가 어딜 가든지 사람들이 그 분을 쳐다봐요. 히잡을 쓰고 있거든요. 저번에 약국에 같이 약을 사러 갔을 땐, 약사가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녀가 예멘에서 왔다고 대답하니 그 약사분이 ‘아, 제주도’, ‘난민들 많이 왔다더니’라고 하시는데 그 뉘앙스가 좋진 않았어요. 저는 한국어를 잘 몰라서 못 알아들었지만 그 아내분은 전남대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기 때문에 알아들었고, 그래서 기분 나빠하더라고요.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핸드폰이 고장나서 서비스를 받으러 갔는데, 담당 직원분이 ‘ONLY Korean’이라고 하시면서 한국어만 가능하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어요.

 

그건 영어를 잘 못해서 그럴 수도 있어요. 계약서가 모두 영어로 되어 있는데 설명하기가 복잡해서 그럴 수도 있고요.

 

태국 사람들도 영어 잘 못해요. 그렇지만 영어를 못한다고 아예 서비스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아요. 적어도 도와주려는 태도는 보입니다. 또 한국의 다른 통신사로 가서 서비스를 받을 때, 그 분도 영어를 잘 못하셨지만 친절하게 해주신 덕분에 30분 안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거든요.

 

음, 그건 사람에 따른 차이일 수도 있겠네요.

 

네.

 

지금 태국을 떠난 이유가 왕실모독죄 때문이잖아요. UN난민기구나 엠네스티에서는 태국정부에 대해 어떤 권고를 했나요? 차녹난씨는 왕실모독죄와 관련해서 NDM에서 어떤 활동을 했나요?

 

NDM에서 저희는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저는 태국에서 군부쿠데타가 일어난 지 1년 뒤인 2015년에 NDM이라는 단체를 공동설립했습니다. 저희는 독재와 군부쿠데타에 대항한 가두시위를 거의 매달 진행했고요. 대중에게 독재, 군부쿠데타, 인권, 왕실모독죄, 민주주의에 대해 강연 등을 통해 알리는 일도 했습니다. 그 달에 일어난 문제에 대해 뉴스레터도 발행했고요. 주로는 전국의 대학생을 포함한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을 모으고 조직하는 일을 했습니다. 저희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젊은 청년들이 NDM에 함께하는 것이었어요.

 

단체가 설립된 2015년 이전에는 주요 활동가들이 모두 대학생들이었기 때문에 본인이 속한 대학교에 기반해서 활동했습니다. 전국의 대학생들이 모여서 그룹을 조직해야 된다는 것이 합의되고, NDM을 설립한 것이죠. 저희가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단체가 확장됐어요. 학자들, 작가, 변호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조직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태국의 현 정치상황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1932년 시암 혁명이 일어나고 그 때 태국은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바뀌었는데요. 당시 헌법이 만들어진 이후 80년간 18번의 쿠데타가 있었고 13번의 쿠데타가 성공합니다. 태국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당시 헌법이 만들어진 이후로 태국의 민주주의가 더 나아가지도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태국은 정치적으로 격동의 시기를 겪어왔는데, 뭔가 나아가려고 하면 쿠데타가 일어나고, 또 나아가려고 하면 쿠데타가 일어나는 상황이었죠. 2014년 쿠데타가 가장 최근에 일어났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쿠데타는 왕의 죽음이라는 가장 큰 변화 후에 일어난 것입니다. 왕이 죽고 나서, 군부가 나라를 어느 정도 세팅하려는 목적으로 일어난 것이고요. 이 과정에서 근 4년간 어마어마하게 많은 인권침해 사례가 발생했고, 왕실모독죄로 기소된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민간인들도 군법정에 서는 사례가 많아졌고요. 인권침해 외에도 가장 문제되는 것은 표현의 자유가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학계에서도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고, 교수들도 체포된 상황입니다. 저를 가르쳐주신 교수님들도 체포되셨어요. 독재나 쿠데타에 관련되어서 자유롭게 비판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제가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는데도 정치에 관련한 이야기를 할 수 없어요.

 

태국의 대학생들이나 배운 사람들을 중심으로 정부에 대한 대항이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시민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나요? 한국의 경우 촛불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시민들의 많은 참여가 있었기 때문에 파급력이 있었던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거든요. 태국에서는 군부독재에 대항한 집회 같은 것들이 누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나요?

 

교육수준에 따라 나뉘는 것은 아니고, 경제적인 지위에 따라 나눌 수는 있을 것 같아요. 레드 셔츠는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편이고, 옐로 셔츠는 왕실을 지지하는 편이에요. 옐로 셔츠가 중산층이라면 레드 셔츠는 풀뿌리 계급이죠.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도 경제적인 지위에 따라 다시 나뉘는 편이에요.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엄청나게 많은 대중시위가 진행됐고, 몇백만명이 모였어요. 그런데 당시 방콕 시내 한복판에서 시위 참가자 99명이 죽었어요. 누가 살인을 지시했는지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시위에 참가하는 것을 아직도 많이 두려워하는 상황입니다.

 

태국의 상황이 광주 상황과 비슷해서 다시금 놀라고 있는데요. 태국의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한국의 국민들이, 광주의 시민들이 공감하고 연대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어려운 문제에요. 사실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음... 최근에 한국은 난민 이슈를 당면했죠. 한국에서도 난민 이슈가 논쟁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난민과 세계 인권상황에 대해 한국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예를 들어서 예멘이 어디에 있는지, 예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그들은 가짜난민이고 한국에 돈을 벌기 위해 침공하러 왔다는 식으로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고 다른 문화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지금 한국의 민족주의, 순혈주의는 굉장히 강하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외국인들은 물론 한국인 본인들에게도 좋은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자국이 최고이고, 외국인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들, 다른 나라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 굉장히 에고가 센 것이고 어떻게보면 오만한 것이죠.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보면 그 어딘가에 외국인노동자들도 분명 존재하고 있거든요.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한국 국민들이 다른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배웠으면 좋겠고요. 태국에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가고 있는데, 그들이 쓰는 돈이 태국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어요. 태국에서 관광객들이 쓰는 돈이 태국 국민들을 압제하는 시스템을 공고히 하는 데에 쓰이는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잖아요. 일례로 태국에는 왕실과 관련된 관광지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 곳에 가서 돈을 쓰는 것은 시스템을 강화시키는 데 일조한다는 것이죠.

 

외국인 친구가 있는 경우에는 그 친구의 문화, 그 친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것들이 필요합니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문화적 차이와 그 다양성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는 폭을 넓힌다면 더 나은 한국이 될 것이라 생각해요.

 

올해 난민신청 한 후 굉장히 많은 언론매체에서 연락이 왔잖아요. 난민인정이 된 후에도요. 그 기사를 다 읽었나요? 읽었다면 불편한 부분은 없었나요? 불편했다면 왜 불편했나요?

 

제가 나온 기사는 다 읽었습니다. 한국인 친구가 한 문장씩 번역해주어서 다 읽었고요. 우선 한국 매체들이 저의 상황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고 매우 기쁩니다. 태국의 상황을 알릴 수 있음에 매우 감사하고요.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은 있는데요. 매체에서는 드라마를 팔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전에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는 제가 울었던 것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언급을 했고요. 뭔가 이 상황을 드라마틱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것 같더라고요. 한국인 친구는 ‘그게 더 좋다’, ‘한국인들은 그런 드라마틱한 걸 좋아한다’, ‘이걸 읽으면 한국 사람들이 너의 상황에 더 공감하고 동정할 것이다’라고 하는데요. 사실 미디어가 난민에 대한 시선을 만들어내고 외모에 관한 고정관념을 양산하는 가장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매우 위험하다고도 느낍니다. 지금 상자 밖에 어떠한 현실이 있는지 보지 못하게 하고 난민의 다양성을 알지 못하게 만드니까요.

 

한겨레21에서 “민주천사 난민을 한국은 안아줄 수 있을까”라는 타이틀을 붙였는데요. 차라리 ‘민주 전사’가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어요. 태국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여성 활동가는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하죠. 이 사람이 합리적인 사람인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보지 않고 되려 감정적인 사람, 외모가 어떻게 보일지 신경쓰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한 사람을 인간(human)으로 보는 게 아니라 여성(woman)으로 보는 거죠. 사실 한겨레가 “민주천사”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 게 아니고, 태국매체가 “민주천사”라고 한 것을 그대로 쓴 것이에요.

 

광주에서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하고 싶나요? 그리고 그 이유는?

 

저는 난민이슈, 성소수자 이슈, 임신중단권 이슈에 관심이 있어요. 제가 한국어를 못해서 지금 당장 일을 구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이슈들을 다루는 광주의 단체들에서 자원활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단체들이 어떻게 조직을 만들어가고 일하고 있는지도 배울 수 있을 것이고요.

 

동행에서 태국의 인신매매 여성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태국어 통역을 구할 수 없어서 태국어를 영어로 통역하는 것을 부탁한 적이 있잖아요. 사실 그 때 굉장히 도움이 됐어요. 이후에 차녹난 씨가 “제가 쓸모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I feel I’m useful)”라고 말했잖아요. 그게 마음에 많이 남았어요.

 

차녹난씨는 앞으로 어떤 사람이고 싶어요? 그리고 그 이유는?

 

제가 이 질문에 대답하면 너무 드라마틱해서 마치 한겨레21 기사처럼 될 것 같은데요.(일동 웃음) 드라마틱한 걸 원하시나요?

 

하하하, 아뇨. 다음 질문하고도 연결이 돼요. 차녹난 씨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어요? 이건 당신을 보여줄 수 있는 질문이기 때문에 물어보는 거에요.

 

저는 인권활동가로서 인권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항상이요. 제 삶이 끝나는 날까지요. 물론 그게 매우 힘든 일이라는 것은 알아요. 태국에서 활동을 할 때 이런 말을 하곤 해요. “너 자신을 바꿔야 한다. 아니면 세상이 너를 바꿀 것이다.” 사회가 한 사람을 만들고 한 사람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만들어가는 세상에서, 아직 저는 스스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 제 소명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지난 시간동안 그랬다는 것이 매우 자랑스럽고요. 인권운동에 발을 담근 이후로 아직 스스로를 져버린 적이 없어요.

 

그리고 자본주의에 관련해서 활동하고 싶어요. 활동에는 돈이 필요하고 활동가는 돈을 많이 벌지 못하죠. 인권 단체를 만들어도 주종이 바뀌어서 돈이 활동가를 사는 경우도 생겨요. 단체를 설립하고 인권을 위해 활동하지만 모금에만 지원하게 되면서 사실상 순서가 뒤바뀌는 거죠. 돈을 받으면 또 돈을 준 기관을 비판하기가 어려워지잖아요. 지원기관에서 인권침해 상황이 있을 때 그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어려워지는 거죠.

 

왜 활동가가 되고 싶은 거에요? 왜 인권을 위해 싸우고 싶은 거죠?

 

재밌으니까요.

 

왜 재밌어요?

 

도전할 수 있잖아요. 저도 인권을 침해받은 경험이 있고 그게 얼마나 끔찍하고 어려운 상황인지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도 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더욱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겠죠. 생각해보면 누구나 다 인권 침해나 차별 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을 거에요. 인권이라는 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것이고 보호받아야 되는 것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일을 하는 걸 좋아합니다.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요.

 

지금까지 인터뷰가 어땠나요?

 

인터뷰는 음... 다른 인터뷰들과는 달랐어요. 다른 인터뷰들은 모두 태국의 정치상황과 저 개인을 분리시켜서 물어봤거든요. 이 인터뷰를 읽는 독자들은 태국의 정치상황이든 난민 이슈든 모든 것을 제 관점에서 보게 될 거에요.

 

우리 인터뷰는 광주에 “있는” 난민인정자 차녹난의 목소리 그 자체를 전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이죠. 물어봐줬으면 했는데 물어보지 않은 질문이 있다면요?

 

“제가 쓸모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I feel I’m useful)”라고 말했었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를 말씀드리지 않은 것 같네요. 제가 한국에 와서 10개월 동안 생산적인 일을 별로 하지 못 했고 어떤 일에 진지하게 임할 수가 없었어요. 우선은 한국어를 못하기 때문에 소통하기가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거의 집에서만 머물렀어요. 그런데 저번 기회에 제가 가진 언어적인 능력으로 동행의 일을 도울 수 있어서 제가 쓸모있게 느껴진 거죠. 집에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스스로가 쓸모없게 느껴질 때도 있거든요.

 

마지막으로 나에게 동행이란?

 

동행이라는 이름이 ‘같이 걷는다’라는 뜻인지 최근에서야 알았어요. 그 이름의 뜻을 들었을 때 “와, 정말 딱 맞는 이름이다.”라고 생각했죠. 이소아, 권소연, 전민규, 이현우 변호사, 김지현 통역가 모두 난민신청절차부터 난민인정단계까지 함께 해주어서 따뜻함을 느꼈고, 누군가가 옆에 있어준다는 생각에 정말 고마웠거든요.(일동 박수)

 

아직 박수치지 마세요. 다 안 끝났어요. 제가 더 말하면 다들 울 것 같은데요. 울지마세요, 다들.(일동 웃음^^) 제가 광주에 처음 왔을 때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다들 함께 있었잖아요. 권소연 변호사는 첫 출근날이었고요. 그 날이 사실 광주에서 난민 신청을 하기로 결정한 날이에요. 당시에 한국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이소아 변호사가 “이 케이스를 맡게 되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충분하고 강력한 증거가 있으니 이길 수 있다.”고 말해 주셨어요.(이소아 혼자말 하듯, 권소연과 잠시 속삭이며: 음...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고 말했지, 이길 수 있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는 아무도 저를 돕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는데 적어도 그 날, 그 말을 듣고 저를 도와줄 사람이 있고 제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굉장히 위로를 받았어요. 10개월 동안 같이 난민인정절차를 진행하면서 제가 필요할 때, 체류자격때문에 고통스러웠을 때, 제 질문에 답해줄 사람, 안내해 줄 사람, 함께 싸워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죠. 마음이 따뜻해지는 일이고요. 누군가가 자신을 응원하고 지지해주고 있다는 생각만 해도 고맙고 따뜻하잖아요.

 

때로 우린 싸우기도 했어요.(질문자들 웃음) 두 변호사 모두와 싸웠죠. 이소아 변호사는 저를 제주도에서 오라고 했고(체류기간 연장 때문에), 권소연 변호사는 5.18 아카데미 참여 중에 오라고 했잖아요.(난민면접 때문에) 하지만 변호사님들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에 두 분을 좋아하고 매우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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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어 : 권소연, 이소아, 김지현
통역 : 김지현
녹취 및 편집 : 권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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